제주 서쪽으로 차를 달리는 동안 창밖에 야자수가 줄지어 나타나기 시작하면, 이제 한림공원에 거의 다 왔다는 신호였습니다. 한여름의 협재 바닷가 근처라 공기에는 옅은 짠 기운이 섞여 있었고, 주차장에 내리자마자 키 큰 야자수와 하얗게 핀 문주란이 먼저 우리를 맞아 주었습니다. 단지는 차에서 내리기 무섭게 코를 킁킁대며 낯선 풀냄새를 살피느라 분주했습니다. 부모님과 저, 그리고 단지까지 온 가족이 함께 걷기 좋은 곳을 찾다가 고른 곳이라, 입구에 서기도 전부터 마음이 먼저 들떴습니다. 10만 평이 넘는 부지에 식물원과 용암동굴, 민속마을과 새들의 정원까지 한데 모여 있다 보니 어디부터 봐야 할지 즐거운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도 서두를 이유는 없었습니다. 단지의 짧은 보폭에 걸음을 맞추며, 야자수 그늘을 따라 천천히 첫 번째 온실로 향했습니다.
사철 푸른 유리 온실, 아열대식물원과 선인장 정원
입구를 지나 야자수길을 걷다 보면 커다란 유리 온실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문을 밀고 들어서는 순간 바깥과는 전혀 다른 습하고 따뜻한 공기가 훅 느껴졌습니다. 천장까지 가지를 뻗은 고무나무 아래 하얀 벤치가 놓여 있어 잠시 앉아 쉬었는데, 단지가 제 다리 곁에 바싹 붙어 고개를 빤히 올려다보았습니다. 더운 날 온실 안은 단지에게도 조금 후텁지근했는지, 자꾸만 그늘진 벤치 밑으로 파고들려 하더라고요. 온실 안쪽으로는 밑동이 항아리처럼 불룩한 코끼리발나무가 서 있었습니다. 그 거친 줄기를 어머니가 가만히 짚어 보시는 사이, 단지는 벽돌길 위에서 다음 길이 궁금한 듯 앞장을 섰습니다.

키 큰 용과 줄기에는 손바닥만 한 꽃봉오리가 막 벌어지려 하고 있어, 발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조금 더 걸으니 천장 가까이 붉은 부겐빌레아가 폭포처럼 늘어진 온실이 이어졌고, 바닥까지 떨어진 분홍 꽃잎이 길을 온통 분홍빛으로 물들여놓았습니다. 그 아래에서 단지는 떨어진 꽃잎 냄새를 한참이나 맡았습니다.

온실을 빠져나오면 선인장 정원이 펼쳐집니다. 사람 키만 한 부채선인장과 둥근 금호선인장이 비탈 가득 무리 지어 있었고, 마침 백년초 꽃이 노랗게 올라와 있었습니다. 가시투성이 정원이라 단지가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줄을 짧게 잡고, 화산석 경계 안쪽으로만 천천히 둘러보았습니다. 야외 정원과 온실 사이에는 잉어가 헤엄치는 작은 연못도 있어, 검은 현무암 바위에 걸터앉아 한숨을 돌렸습니다. 단지는 물가의 비릿한 냄새가 신기한지 코끝을 연신 들이밀었습니다.

참고로 한림공원은 반려동물 동반이 가능하지만, 7kg 미만 소형견에 한해 배변봉투 지참과 목줄 착용을 조건으로 입장할 수 있으니, 우리 아이의 몸무게가 애매하다면 방문 전에 한림공원 이용안내에서 한 번 확인해 두시길 권합니다.
돌로 빚은 제주의 옛 살림, 재암민속마을과 제주석·분재원
선인장 정원을 지나면 분위기가 사뭇 달라집니다. 키 큰 소나무와 단풍나무 아래, 사람 얼굴을 닮은 제주 돌들이 잔디밭 곳곳에 세워진 제주석·분재원이 나옵니다. 오랜 세월 비바람에 깎인 돌들이 저마다 다른 표정을 짓고 있어, 어머니는 그 가운데 둥근 바위 하나에 손을 얹고 한참을 바라보셨습니다. 붉게 물든 단풍나무 분재가 줄지어 있어, 한여름인데도 그 그늘 아래에는 가을빛이 살짝 비치는 듯했습니다. 단지는 잔디 냄새가 좋은지 코를 땅에 박고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습니다.

분재원을 빠져나오면 초가지붕을 얹은 재암민속마을이 이어집니다. 마당 앞에는 돌로 빚은 말 두 마리가 마주 보고 서 있었고, 그 곁에는 곡식을 빻던 연자방아 돌들이 탑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었습니다. 단지를 데리고 돌말 사이에 서니, 마치 옛 제주의 어느 마을 어귀에 들어선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작은 당나귀 모양 돌조각 위에 살짝 걸터앉아 단지와 함께 사진을 한 장 남겼는데, 단지는 그새 더위가 가셨는지 혀를 길게 빼고 카메라를 빤히 쳐다보았습니다. 부모님은 그 모습을 보며 연신 웃으셨고, 저도 셔터를 누르느라 한참을 그 자리에 머물렀습니다.

한림공원은 본래 송봉규 선생이 1971년 황무지나 다름없던 모래밭에 한 그루씩 나무를 심어 일군 곳입니다. 민속마을 입구의 '재암(財巖)'이라는 이름도 그분의 호에서 따온 것이라, 돌담 하나 초가 한 채에도 오랜 정성이 배어 있는 듯했습니다. 운영시간은 계절마다 조금씩 다른데, 저희가 찾은 여름철(6~8월)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 50분까지 문을 열었습니다. 입장료는 성인 15,000원, 만 65세 이상은 12,000원이며, 자세한 요금과 시기별 운영시간은 한림공원 안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차장은 따로 요금을 받지 않아 부담 없이 차를 대고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공작이 노니는 철망 너머, 새들의 정원과 연못 길
민속마을을 지나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새들의 정원이었습니다. 커다란 돔 모양 철망 안에 공작 여러 마리가 한가로이 노닐고 있었는데, 마침 한 마리가 깃을 반쯤 펼친 채 물가를 거닐어 한참을 멈춰 서서 바라보았습니다. 어머니는 철망 가까이 다가가 공작 쪽으로 카메라를 들이미셨고, 그동안 단지는 제 품에 안겨 새들의 움직임을 조용히 지켜보았습니다. 평소 같으면 작은 새 한 마리에도 귀를 쫑긋 세웠을 텐데, 이날만큼은 처음 보는 커다란 새가 어리둥절했는지 얌전히 안겨만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못내 사랑스러워 공작 우리를 배경으로 단지를 안고 사진을 남겼습니다. 푸른 깃을 늘어뜨린 공작이 가끔 길게 우는 소리를 낼 때마다 단지가 귀를 살짝 움찔하던 것도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새들의 정원을 나와 다시 야자수길로 접어드니, 길가 화단에는 하얀 문주란이 별처럼 피어 있었습니다. 단지는 야자수 그늘 아래 떨어진 솔잎을 밟으며 가벼운 걸음으로 앞서 걸었고, 저는 그 뒤를 따라가며 길섶의 꽃을 눈에 담았습니다. 길 끝 작은 정원에는 인공 폭포가 시원하게 떨어지고 있었고, 그 곁 돌 벤치에 앉아 단지를 무릎에 올린 채 잠시 숨을 골랐습니다. 폭포 물소리에 더위가 한결 가시는 듯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람 키를 훌쩍 넘는 기암 앞에 섰는데, 오랜 세월 구멍이 숭숭 뚫린 그 거대한 돌이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보였습니다. 거대한 기암 곁은 한림공원에서 사진을 남기기 좋은 자리로 꼽히는 곳이라, 단지를 안고 그 아래에 서니 돌이 더욱 커 보여 사진 속 단지가 한층 작게 담겼습니다. 전시관 안에는 '백년해로(百年偕老)'라 새긴 커다란 나무뿌리 조각도 놓여 있어, 한림공원이 단순한 식물원을 넘어 제주의 자연과 옛 손길을 함께 품은 곳임을 새삼 느꼈습니다. 한 바퀴를 천천히 도는 데 두세 시간이 걸렸지만, 그늘이 많고 길이 대체로 평탄해 단지도 끝까지 지치지 않고 가족의 걸음을 잘 따라와 주었습니다.

돌아 나오는 길, 입구의 야자수가 다시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 곳 안에 온실과 선인장 정원, 옛 제주의 살림과 새들의 정원까지 담겨 있어, 짧은 한나절에 제주의 여러 표정을 한꺼번에 만난 기분이었습니다. 더운 날이었지만 그늘진 길이 많아 단지도 큰 무리 없이 가족의 걸음을 따라 주었고, 가시 정원과 연못 앞에서 줄을 짧게 잡은 것 말고는 특별히 신경 쓸 일도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부모님과 단지, 그리고 제가 같은 풍경을 나란히 바라보며 천천히 걸었던 그 시간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습니다. 온실의 따뜻한 공기와 분홍 꽃잎이 깔린 길, 돌말 곁에서 혀를 빼고 웃던 단지의 얼굴이 사진 속에 고스란히 담겨, 지금도 그날의 습한 공기까지 함께 떠오릅니다. 반려견과 함께 제주 서쪽을 여행하신다면, 한 곳에서 식물원과 민속마을을 모두 누릴 수 있는 이곳을 한 번쯤 천천히 걸어 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