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제주의 하늘은 잿빛으로 낮게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바다 빛은 흐렸지만 바람은 살갗에 부드럽게 닿았고, 저는 부모님과 함께 섬의 서쪽 끝을 향해 길을 나섰습니다. 품에는 단지가 안겨 있었습니다. 어디로 떠나든 단지는 늘 제 곁에서 작은 숨을 고르며 함께 걸어 주던 반려견이었습니다. 그날 아침 우리는 송악산 바닷가에서 하루를 열었고, 오후에는 섬을 가로질러 한림의 작은 돌 정원까지 둘러보았습니다. 두 곳은 차로 한참을 달려야 하는 먼 거리였지만, 창밖으로 흘러가는 제주의 밭담과 바다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사로워졌습니다. 멀게 이어 붙인 동선이 아쉽기보다, 오히려 하루가 더 넉넉하게 늘어나는 기분이었습니다. 어디를 얼마나 보았느냐보다, 누구와 함께 그 길 위에 있었느냐가 더 오래 남는다는 것을 그날 다시 느꼈습니다. 서두르지 않고 단지와 함께 보낸 그 하루를, 저는 오래 품어 두고 싶었습니다.
바다가 산을 에워싼 자리, 송악산 기념탑 앞에서
송악산은 제주 남서쪽 대정읍 상모리 바닷가에 나지막이 솟은 산입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바다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검은 화산석을 그대로 깎아 세운 커다란 기념탑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돌 위에는 조국의 미래, 청년의 책임이라는 글귀가 한자로 굵게 새겨져 있었고, 받침대의 동판에는 송악산과 아흔아홉 봉우리를 노래한 시가 적혀 있었습니다. 송악산이 아흔아홉 개의 작은 봉우리를 품었다 하여 예부터 99봉으로도 불렸다는 이야기를, 저는 그 돌 앞에서 처음 알았습니다. 모슬포의 한 청년단체가 세운 탑이라 하니, 거친 바다를 마주한 그 자리에 담긴 마음이 더 묵직하게 다가왔습니다. 기념탑 뒤로는 흐린 바다가 넓게 펼쳐졌고, 맑은 날이면 형제섬과 가파도, 마라도까지 또렷이 보인다는데 그날은 안개에 잠겨 윤곽만 어렴풋했습니다. 양산을 든 사람들도 저마다 그 앞에서 바다를 바라보다 사진을 남기고 있었습니다. 기념탑을 지나 해안을 따라 난 산책로를 천천히 걸었습니다. 발밑에는 검붉은 송이 흙이 폭신하게 깔려 있었고, 오른편으로는 검은 절벽이 오랜 세월 파도에 깎인 결을 드러냈습니다. 왼편 풀밭은 바람이 지날 때마다 한 방향으로 누웠다 다시 일어섰고, 발아래에서는 파도가 절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올라왔습니다. 흐린 날이라 수평선은 희뿌옇게 번졌지만, 그래서 오히려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부드럽게 풀어지는 풍경이었습니다. 단지는 목줄을 한 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길바닥 냄새를 맡았고, 낯선 바닷바람이 코끝에 닿을 때마다 가만히 멈춰 고개를 들곤 했습니다. 나이가 든 뒤로는 오래 걷는 일을 힘겨워해서, 우리는 둘레길을 끝까지 욕심내지 않았습니다. 바다가 가장 넓게 보이는 자리까지만 걷다가, 단지가 숨을 고르면 우리도 함께 멈춰 쉬었습니다. 그날만큼은 단지의 걸음에 속도를 맞추는 일이 우리 가족의 가장 중요한 일정이었습니다.

손수 모아 가꾼 돌정원, 한림 돌마을공원
송악산을 나선 우리는 서쪽 해안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한참을 올라갔습니다. 바다를 오른쪽에 두고 달리다 보니 어느새 한림읍 금능리에 닿았고, 조용한 도로변 한쪽에 돌마을공원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은 고광익 님이 삼십여 년 동안 제주의 자연석과 화산석을 손수 모아 가꾼 정원이라고 합니다. 주소는 한림읍 금능남로 421번지로, 협재와 금능 바다에서 멀지 않은 마을 안쪽입니다. 한 사람이 오랜 세월 돌을 모으고 세워 만든 공간이라는 사실이, 문을 들어서기 전부터 마음을 가다듬게 했습니다. 입구의 나무판에는 제주말로 적힌 글귀가 걸려 있었습니다. 먼 길 오느라 폭삭 속았다는 인사와, 쉬엄쉬엄 많이 보고 가라는 정겨운 환영의 말이었습니다. 손글씨로 눌러쓴 그 한 줄에 마음이 먼저 누그러졌습니다.

안으로 들어서자 화산석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형상들이 길을 따라 늘어서 있었습니다. 어떤 것은 사람의 얼굴을 닮았고, 어떤 것은 두 손을 모은 미륵처럼 보였으며, 구멍이 숭숭 뚫린 돌은 그 자체로 하나의 조각 같았습니다. 정해진 순서 없이 굽이굽이 이어진 길을 따라 걸으니, 모퉁이를 돌 때마다 새로운 돌 하나가 말을 걸어오는 듯했습니다. 끝이 뾰족하게 올라간 돌탑 위에는 작은 돌 하나가 새처럼 얹혀 있어, 한참을 올려다보게 했습니다. 사람이 깎은 듯 아닌 듯한 그 경계가 이 정원의 가장 큰 매력이었습니다. 돌담을 따라서는 키 큰 소나무가 그늘을 드리웠고, 그 아래 평평한 돌 하나가 마치 누군가의 자리처럼 가만히 놓여 있었습니다. 바닥에는 제주 특유의 너럭바위인 빌레가 드러나, 정원 전체가 본래의 땅 위에 자연스럽게 얹힌 것처럼 보였습니다. 안쪽으로는 초록빛이 도는 마당과 살림집이 보였는데, 누군가 실제로 살며 날마다 이 돌들을 매만지고 있다는 것이 그제야 실감 났습니다. 돌과 나무와 풀이 다투지 않고 천천히 어우러진 풍경 속을, 우리는 말을 아끼며 느리게 걸었습니다.

화산석 마당에 머문 한낮, 단지와 함께
정원 안쪽에는 둥근 송이돌이 점점이 박힌 잔디 마당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검붉은 화산석들이 풀밭 위에 알알이 놓여, 작은 언덕 하나가 통째로 누군가의 정성으로 채워진 듯했습니다. 어머니는 그 돌 하나에 걸터앉아 잠시 숨을 돌리셨고, 아버지는 마당을 천천히 거닐며 돌 하나하나에 눈을 맞추셨습니다.

저는 담요로 둘러 안고 있던 단지를 가만히 고쳐 안았습니다. 마침 길가에 돌로 빚은 작은 강아지상이 하나 있어, 진짜 강아지인 단지와 나란히 세워 두니 둘이 서로를 바라보는 것만 같아 한참을 웃었습니다. 단지는 낯선 마당이 신기한지 코를 한껏 벌름이며 사방의 냄새를 살폈습니다. 다리에 힘이 빠질 무렵에는 다시 담요 속으로 파고들어 제 품에 몸을 맡겼고, 저는 그 무게가 새삼 소중해 한동안 자리를 옮기지 못했습니다. 마을 안쪽이라 오가는 사람도 드물어, 마당에는 바람에 풀잎 스치는 소리와 단지의 옅은 숨소리만 가만히 내려앉았습니다. 마당 한편 나뭇가지에는 노란 하트 모양의 글자들이 사랑의 말이 되어 줄지어 매달려 있었습니다. 부모님은 그 아래에서 손을 맞잡고 사진을 남기셨습니다. 평생을 함께 걸어온 두 분이 낯선 정원에서 다시 한번 마주 웃는 모습을, 저는 단지를 안은 채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

흐린 하늘 아래였지만 마당에는 묘하게 따뜻한 기운이 돌았고, 우리는 굳이 말을 보태지 않아도 마음이 통하는 듯했습니다. 화산석으로 가득한 이 정원이 차갑지 않고 오히려 포근하게 느껴졌던 것은, 돌마다 한 사람의 손길과 긴 시간이 배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거친 돌을 다정한 풍경으로 바꾸어 놓은 정성 앞에서, 우리는 자꾸만 걸음을 늦추게 되었습니다. 단지도 그 온기를 느꼈는지, 평소보다 칭얼대지 않고 제 품에서 오래도록 편안히 머물러 주었습니다. 돌 사이를 천천히 걷다 보니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조차 잊었습니다. 거창한 볼거리는 아니어도, 그 잔잔한 한낮이 그날 우리가 받은 가장 큰 선물이었습니다.

송악산의 바다에서 시작해 한림의 돌 정원에서 저문 그 하루는, 멀리 돌아온 길이 조금도 아깝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거친 화산석으로 빚어진 풍경 사이에서, 저는 오히려 가장 부드러운 것들을 보았습니다. 바람에 누웠다 일어서던 풀과, 손을 맞잡은 부모님의 뒷모습과, 제 품에서 가만히 숨을 고르던 단지. 지금도 그날을 떠올리면 검은 돌의 거친 결과 단지의 작은 온기가 함께 되살아납니다. 제주의 서쪽을 천천히 걷고 싶은 분이라면, 송악산의 바닷길과 한림의 작은 돌 정원을 같은 하루에 이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서두르지 않는 걸음이라면, 멀리 떨어진 두 곳도 충분히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날의 바닷바람과 돌의 온기는 사진보다 마음에 더 또렷이 남았습니다. 단지와 함께였기에 더 오래 남은 그 하루를, 저는 이렇게 한 자 한 자 글로 적어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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