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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견 동반 여행기

성읍민속마을, 오백 년 도읍지 (성문과 성벽, 초가집, 돌하르방)

by 반려견과여행 2026. 6. 22.

붉은 송이가 깔린 길을 밟으며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 검은 현무암을 쌓아 만든 성벽과 그 위로 날렵하게 솟은 성문이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다른 민속촌과 달리 이곳은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는 마을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박제된 옛 모습이 아니라 살아 있는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었습니다. 흐린 하늘 아래 둥근 초가지붕들이 낮게 엎드려 있었고, 돌담 사이로 난 골목은 어디로 이어질지 가늠이 되지 않았습니다. 단지는 낯선 흙냄새가 좋은지 코를 땅에 박고 앞장서 걸었고, 부모님은 마당 한쪽에 매달린 푸른 열매를 올려다보며 한참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비가 갠 뒤라 붉은 흙길에서는 흙냄새가 짙게 올라왔고, 그 위로 단지의 발자국이 작게 찍혔습니다. 어디서부터 둘러볼지 정하지 않은 채, 그저 돌담이 이끄는 대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로 했습니다.

성벽

오백 년 세월을 두른, 성문과 성벽

마을을 감싼 성벽은 정의현성이라 불리는 옛 읍성의 흔적입니다. 조선 태종 무렵 제주가 세 고을로 나뉘어 다스려지던 시절, 정의현의 관청이 이곳으로 옮겨 온 뒤로 오백 년 가까이 고을의 중심이었다고 하니, 발밑의 돌 하나하나에 그만큼의 시간이 쌓여 있는 셈이었습니다. 검은 현무암을 큼직하게 쌓아 올린 성벽은 매끈하게 다듬어지지 않아 오히려 투박한 힘이 느껴졌고, 구멍이 숭숭 뚫린 돌 틈으로 풀이 자라 세월의 흔적을 더했습니다.

성문 누각 아래에 서서 위를 올려다보니, 단청을 입힌 붉은 기둥과 곡선을 그리는 기와지붕이 회색 하늘과 묘하게 어우러졌습니다. 누각에 올라 마을 쪽을 바라보면 둥근 초가지붕들이 발아래로 펼쳐졌는데, 낮게 엎드린 지붕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 한 폭의 옛 그림 같았습니다. 성문 옆 돌담 곁에는 마을을 지키듯 돌하르방이 서 있어, 오가는 사람들이 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곤 했습니다. 옛날에는 이 문을 통해 사람과 우마가 드나들며 하루를 시작했을 텐데, 그 자리에 서 있자니 오래전 마을의 아침이 어렴풋이 그려졌습니다.

성벽 위로 난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성곽이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한눈에 들어옵니다. 군데군데 세워진 창처럼 생긴 쇠기둥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울퉁불퉁한 돌담이 들판 사이로 길게 굽이쳐 멀어졌습니다. 성벽 너머로는 너른 들판과 멀리 한라산 자락이 안개에 잠겨 있어, 마을이 산과 들 사이에 폭 안긴 자리에 들어섰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노부모님과 단지가 함께라 걸음을 서두르지 않았는데, 돌이 고르지 않아 오히려 천천히 걷기를 잘했다 싶었습니다. 발이 작은 반려견에게는 돌 틈이 자칫 위험할 수 있어, 성벽 위에서는 단지를 안고 걷거나 평탄한 흙길로 돌아 내려오는 편이 안전했습니다. 성벽을 따라 한 바퀴 두르고 나니, 이 마을이 왜 오랜 세월 한자리를 지켜 왔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고, 돌을 쌓아 올린 옛사람들의 손길이 새삼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성문위에서

사람이 살아가는, 초가집과 골목길

성문을 지나 마을 안으로 들어서면 둥근 초가지붕을 인 집들이 줄지어 나타납니다. 제주의 거센 바람을 견디기 위해 지붕을 낮게 얹고 새끼줄로 촘촘히 얽어맨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빗물에 젖은 짚더미에서 풍기는 냄새가 어쩐지 정겨웠습니다. 집을 둘러싼 돌담은 사람 키를 넘지 않을 만큼 낮아, 담 너머로 마당과 장독대가 그대로 보였습니다. 마당 한쪽에는 제주 전통 화장실인 통시의 흔적도 남아 있어, 옛사람들의 살림살이를 가까이에서 가늠해 볼 수 있었습니다. 골목과 골목이 돌담으로 구불구불 이어져, 한 모퉁이를 돌 때마다 새로운 풍경이 나타났습니다.

초가집

 

무엇보다 이 마을이 특별하게 다가온 건, 지금도 사람들이 실제로 살아가는 터전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어느 집 마당에는 빨래가 널려 있고 또 어느 집 처마 밑에는 농기구가 놓여 있어, 박물관 속 풍경이 아니라 누군가의 일상 한가운데를 조심스레 지나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한 초가 마당 어귀에는 덩굴을 올린 나무가 넓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는데, 가지마다 푸른 열매가 조롱조롱 매달려 부모님이 한참을 올려다보셨습니다. 손을 뻗어 열매를 가리키며 무슨 나무인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시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그 곁에 한참 서 있었습니다.

골목을 걷는 내내 단지도 신이 났습니다. 돌담을 따라 난 좁은 길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느라 자꾸만 걸음이 더뎌졌는데, 흙길이라 발바닥이 편했는지 평소보다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습니다. 비가 갠 뒤라 골목이 한층 한산했는데, 인적이 드문 돌담길을 단지와 단둘이 걷는 듯한 고요가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야외로 이어진 마을 길은 목줄을 한 반려견과 함께 천천히 걷기에 좋았지만, 주민들이 실제로 거주하고 일부 가옥은 관람이 제한될 수 있어 마당 안으로 함부로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했습니다. 사람 사는 골목을 강아지와 나란히 걷는 그 평범한 시간이, 오히려 이날 가장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마을을 지켜 온, 돌하르방과 오래된 나무

마을 한가운데 너른 마당에 이르면 돌하르방들이 길목마다 서서 오가는 사람을 맞이합니다. 둥근 눈과 다부진 입매가 제각각이라, 같은 듯 다른 표정을 견주어 보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돌하르방 곁에는 소나 말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막아 두던 정낭의 흔적과 너른 마당 자리도 남아 있어, 옛 마을의 살림살이가 어떠했을지 어렴풋이 그려졌습니다. 한쪽에는 곡식을 빻던 연자방아도 놓여 있어,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일하던 풍경을 떠올려 보게 했습니다.

돌하르방과 오래된 나무

 

마당 한편에는 정의현의 관청 건물이었던 일관헌이 자리하고, 그 곁으로는 오래된 나무들이 깊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습니다. 일관헌 주변의 느티나무 한 그루와 팽나무 세 그루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데, 오백 년 도읍지의 세월을 묵묵히 지켜본 나무들이라 생각하니 그 앞에 서는 마음가짐이 사뭇 달라졌습니다. 마을 한편에는 옛 정의현의 향교도 남아 있어, 이곳이 단순한 살림 마을이 아니라 고을의 행정과 배움을 아우르던 중심지였음을 짐작하게 했습니다. 너른 그늘 아래에 잠시 앉아 숨을 고르는 동안, 단지도 시원한 바람에 혀를 내밀고 엎드려 쉬었습니다. 이 마을에는 오메기술과 고소리술처럼 대를 이어 전해 내려오는 향토 무형문화재도 살아 있어, 눈에 보이는 풍경 너머의 이야기까지 함께 만날 수 있었습니다.

성읍민속마을은 입장료가 따로 없고 너른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어, 차로 찾아가 편히 둘러보기에 좋았습니다. 주소는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정의현로 30이며, 마을의 역사와 가옥에 얽힌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무료로 운영되는 문화관광해설사의 안내를 받아 볼 수도 있습니다. 해설사의 설명을 잠시 곁귀로 들으니, 무심히 지나칠 법한 돌담 하나에도 마을의 내력이 깃들어 있어 발걸음이 절로 느려졌습니다. 마을에 얽힌 더 자세한 내력은 한국관광공사 대한민국 구석구석에서 확인할 수 있어, 방문 전에 미리 살펴 두면 마을이 한층 다르게 보입니다.

 

 

마을을 다 둘러보고 성문을 나서는 길에, 오백 년이라는 시간이 박제된 유물이 아니라 지금도 누군가의 일상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묵직하게 다가왔습니다. 잘 꾸며진 관광지와 달리 이곳은 사람의 온기가 그대로 남아 있어, 걸음이 느린 노부모님과 단지에게도 부담 없이 어울리는 곳이었습니다. 성벽을 걷고, 초가 골목을 지나고, 오래된 나무 아래에서 쉬어 가는 동안 시간이 천천히 흘렀습니다. 빠르게 사진만 남기기보다 골목 하나하나에 깃든 시간을 가만히 짚어 보면, 같은 풍경도 한결 깊게 다가옵니다. 제주 동쪽을 여행하신다면 서두르지 말고 반나절쯤 비워, 돌담이 이끄는 대로 골목을 천천히 걸어 보시길 권해 드립니다. 정의현성을 두른 돌담이 오늘도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마음 한구석이 든든해지는 듯했습니다. 단지와 나란히 걷던 그 고요한 돌담길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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